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루이 비통 (문단 편집) == 역사 == 루이 비통의 역사는 180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1821년 [[프랑스]] 안쉐라는 작은 마을의 한 목공 집안에서 태어난 루이 비통은 어렸을 때부터 자연스레 목공기술을 익힐 수 있었다. 루이비통은 어렸을 적부터 [[파리(프랑스)|파리]]에 대한 동경심이 있었는데 14살이 되던 해 집을 나와 파리로 떠나게 된다. 땡전 한 푼 없었던 루이 비통은 400km가 넘는 거리를 걸어서 갔는데 16살이 되던 1837년 드디어 파리에 도착했다. 이후 당시 파리에서 가방 제작으로 유명세를 떨치던 무슈 마레샬 아래에서 견습생으로 일하기 시작했다. 루이 비통의 섬세하고 특별한 기술은 곧장 유명해졌고 귀족들 사이에서도 이름을 알렸다. 많은 양의 짐을 싸는데 탁월한 기술을 갖췄던 루이 비통은 프랑스 왕실 황후 [[외제니 드 몽티조]]의 전담 패커로 일하기 시작했다. 외제니 황후의 후원하에 파리 뇌브 데 카푸신 4번가[* 오늘날 루이 비통의 최고급 핸드백인 [[루이 비통 카퓌신|카퓌신 백]]의 이름이 되는 모티브가 되었다.]에 자신의 이름을 건 포장 회사를 개업했다. 이는 오늘날 루이 비통의 뿌리가 되는 회사이다. 당시 트렁크는 현대에서 흔히 만들어지는 사각형이 아니었다. 볼록하게 생겨 차곡차곡 쌓기 힘든 모양새였는데 루이 비통의 트렁크는 평평하게 만들어져 마차에 쌓기 편리한 구조였다. 모양뿐만 아니라 기존의 나무재질에서 루이 비통만의 목공기술을 살려 특별제작한 그레이 트리아농 캔버스라는 소재로 만들어져 가볍기도 했다. 이러한 혁신적인 트렁크는 엄청난 성공을 거뒀고 기존 매장에서 수요를 감당할 수 없자 1859년 파리 근교 아니에르에 공방을 세웠다. 아니에르에 있는 이 트렁크 공방은 지금까지도 트렁크 제작을 하는 아주 특별한 장소이다. 1885년에는 [[영국]] [[런던]] 옥스퍼드 거리에 매장을 열면서 첫 해외지점도 오픈했다. 루이 비통의 획기적인 기술과 명성은 아들 조르쥬 비통에게도 이어졌다. 1886년 소매치기들이 가방을 쉽게 열지 못하도록 가방에 자물쇠를 부착하는 기발한 아이디어를 만들어냈다. 너무나도 완벽한 기술이었기 때문에 잠금장치 기술은 아직까지도 요긴하게 쓰이는 중이다. 루이 비통의 대성공으로 그레이 트리아농 캔버스의 모조품들이 판을 치자 1888년 새로운 재질의 제품을 개발한다. 이때 나온 것이 루이 비통의 대표적인 제품인 다미에 캔버스이며, 다미에 캔버스의 모조품들도 끊임없이 나오자 1896년 루이비통의 상징적인 패턴 모노그램 캔버스가 탄생했다. 조르쥬는 모노그램 제품들을 들고 [[튀니지]] 사막을 횡단하며 견고성을 시험할 정도로 힘을 쏟았다. 창업주 루이 비통이 죽고 경영권을 이어받은 조르쥬 비통은 회사를 더욱더 성장시켰다. 1914년에는 [[샹젤리제 거리]]에 세계에서 가장 큰 여행제품 매장인 7층짜리 매장을 세웠다. 1936년부터 1970년까지는 3대 가스톤-루이 비통이 이어받는데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프랑스 전역에 다수의 매장들을 열기 시작하였으며 상품 라인들도 넓히기 시작한다. 1970년부터는 4대 마이클 비통이 가업을 이어받는데, 이 때부터 유럽을 넘어 본격적으로 아시아와 신대륙에서 인기를 끌며 세계화가 진행되었다고 한다. 1987년에는 [[샴페인]] 브랜드 모엣 & 샹동, [[꼬냑]] 브랜드 [[Hennessy]]와 합쳐져 LVMH라는 종합 명품 집단으로 탈바꿈하게 되는데, 얼마 가지 않아 재정적 위기에 직면하게 되고 LV와 MH간에 큰 다툼이 일어나게 된다. 당시 [[크리스찬 디올]]을 소유하고 있던 [[베르나르 아르노]]가 LV측의 요청으로 지분을 투자하여 흑기사로 지분 싸움에 참전하게 되고 이는 그룹의 역사와 뿌리 자체는 바꾸는 선택이 되는데…반대 진영인 MH축의 우군이었던 [[기네스]]의 자금력을 감당해내지 못할 것이라고 판단, LV가문에게 뒷통수를 날리며 MH쪽으로 붙으며 1989년까지 공격적인 지분 인수로 그룹 전체 지분의 43.5%응 확보하게 되며 실권을 장악한다.[* 2023년 2월 기준 LVMH의 시가총액은 4000억 유로를 넘나드는데, 아르노는 이 당시 단돈 26억 유로 투자로 그룹 전체 지분의 43.5%를 확보하게 된다. 그의 엄청난 사업 수완을 옅볼 수 있으며 그는 현재 [[일론 머스크]]와 세계 주식 부호 1위를 다툴 정도로 성장하였다.] 이후 80-90년대 [[셀린느]], [[겐조]], [[벨루티]], [[겔랑]], [[로에베]] 등의 브랜드들을 블랙홀처럼 빨아들이는데, 특히 1997년에는 브랜드 [[마크 제이콥스]]를 인수함과 동시에 그를 그룹의 총괄 디자이너로 임명하며 루이 비통이 대격변을 맞기 시작한다. 일명 3초백으로 불리우는 PVC라인의 모노그램 가방을 대중화시키며, 루이 비통의 매출이 기하급수적으로 상승하여 지금의 규모까지 크게 되었다. 평소 광적인 아트 컬렉터였던 그는 [[무라카미 타카시]], 리처드 프린스, 스테판 스프라우스 등의 [[현대미술|현대 미술가]]들과의 협업은 물론 더 나아가 [[퍼렐 윌리엄스]]를 시작으로 [[마돈나]]는 물론 [[카니예 웨스트]]같이 떠오르던 셀럽과도 협업을 진행하며 유행을 선도하였고 21세기 들어 정착된 용어인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라는 직업명도 사실상 다양한 컬래버레이션을 진행하고 이를 대중화시킨 마크 제이콥스와 비슷한 시기 [[구찌]]를 이끌었던 [[톰 포드]]를 시작으로 굳어진 용어라고 볼 수 있다. 2011년에는 킴 존스가 남성복 디자이너로 임명되며 남성복 컬렉션이 공식적으로는 처음 시작되었다. 2013년 11월 [[마크 제이콥스]]가 떠나고 새로운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발렌시아가]]를 맡고 있던 [[니콜라 제스키에르]]가 임명되었다. 전임인 마크 제이콥스는 새 일자리 대신 자신의 두 레이블에만 집중. 루이 비통의 클래식 팬들은 마크 제이콥스가 너무 상업적인 방향으로 브랜드를 밀고 나가 럭셔리 브랜드로서의 루이 비통의 위상을 낮추었다는 평이 있었기 때문에 그가 떠난 것을 환영하는 분위기. 니콜라 제스키에르는 [[마크 제이콥스]]처럼 엄청난 화제를 모는 스타일은 아니었으나 미래지향적이면서 고풍스러운 미니멀 디자인으로 남녀노소 호불호 없이 브랜드를 전개시켰으며, 조용하고 우직하게 브랜드를 고급화 하는 방향으로 성장시킨다. 또 이 시기부터 니콜라와 발렌시아가 시절부터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던 셀럽들이 루이 비통으로 넘어와 셀럽 위주의 캠페인 홍보, [[SNS]] 활용이 본격화된다. 한편, 2011년부터 남성 부문을 이끌던 킴 존스가 2018년 가을, 겨울 콜렉션을 끝으로 [[크리스찬 디올|디올]]로 건너가며 루이 비통을 떠나고, [[오프화이트]]의 [[버질 아블로]][* 오프화이트의 디자이너 역시 계속 겸직할 예정.]가 새 수석 디자이너가 됐다. 버질 아블로는 가격대가 낮은 브랜드가 아니긴 해도 역사는 굉장히 짧은 신생 [[스트리트 패션]] 브랜드를 전개하고 있었으나, 럭셔리 브랜드 중에서도 최상위 브랜드인 루이 비통의 남성 부문 디자인 수장으로 영입된 인사조치는 상당히 파격적이라는 평. 거기에 루이 비통 역사상 첫 흑인 디자이너에다 비전공자라는 점 역시 여러모로 화제가 되었다. 2023년 2월, 버질이 떠난 남성 부문의 새로운 디렉터로 [[퍼렐 윌리엄스]]가 임명되었다. 동년 여름에 진행될 SS24 컬렉션부터 업무를 맡게 된다고 한다. 버질에 이어 패션 비전공자 출신의 유색인종이 다시 한 번 임명되었다는 점에 더해 그는 21세기 [[대중음악]]계를 대표한 바 있는 아이콘이기에 엄청난 파격성을 띈다고 볼 수도 있으나 루이 비통 입장에서는 주요 후보로 거론되던 영국계 엘리트 디자이너들[* [[Colm Dillane]], [[Matine Rose]], [[Wales Bonner]], [[Telfar Clemens]] 등.]보다는 매출 신장을 위해 이미 인지도가 높고 다방면에서 특출남을 보이는 퍼렐이 오히려 안전한 선택이었다는 의견도 다수 존재한다.[* 과거 [[카니예 웨스트]]가 킴 존스가 떠난 자리에 유력한 적임자였으나 협상 과정에서 틀어진 바가 있어 셀럽이 루이 비통같은 거대 패션 하우스를 총괄하게 된 사례는 최초이다.][* 참고로 퍼렐은 샤넬 뮤즈로 유명했으나 루이 비통과도 굉장히 밀접한 관계였는데, 루이 비통 역사상 처음으로 협업을 진행한 힙합 아티스트는 카니예도 솔자보이도 아닌 퍼렐이었다.] 다만 그는 아직 풀 컬렉션을 진행해본 경험이 없을 뿐더러 그가 과거 디자인했던 제품들 또한 호불호가 꽤나 갈리는 편인지라 그의 실력에 관해서는 우려 섞인 반응들 또한 제기되고 있다. 2023년 4월 29일 하우스 최초의 프리폴(Pre-Fall) [[패션쇼]]를 [[한강]] [[반포대교#잠수교|잠수교]]에서 개최하게 되었다. [[https://heypop.kr/n/53394/|#]] 이번 패션쇼를 위해 [[오징어 게임]]을 연출한 [[황동혁]] 감독이 협업을 하였으며, 해당 쇼는 2023-2024년 한국 방문의 해를 맞아 관광객과 시민들이 함께 즐길 수 있는 시민 참여형 행사로 진행되어 루이 비통 자사 [[소셜 미디어]] 및 서울 곳곳에 설치된 LED 스크린을 통해 패션쇼를 생중계했다. 한국의 슈퍼모델들인 [[정호연]]과 [[최소라]]가 각각 쇼의 오프닝과 클로징을 장식했으며, 쇼의 배경음악으로 [[산울림]]의 곡 '아니 벌써'가 사용되는 등 한국적인 요소들이 더해졌다. 2023년 6월 20일, 퍼렐의 SS24 데뷔 컬렉션이 파리 패션위크 오프닝 날에 진행되었다. 이미 루이 비통 내에는 버질이 없는 동안 컬렉션을 전개해온 특출난 재단사들과 디자이너들이 있으니 퍼렐은 스트릿 컬렉션을 주된 방향성으로 계속 밀고 가며 창의적인 부분에만 집중하고 내실적인 부분은 기존 디자이너들이 보좌 가능하다는 뉘앙스로 얼굴마담 격이라는 우려섞인 의견이 대다수였으나, 이러한 예상과는 전혀 다른 결과물이 나왔다. 전임이었던 버질 아블로와 유의미하게 비교될 정도로 스트릿이랑은 어느 정도 거리를 두며 테일러링 착장을 선보였고, 얼굴마담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기존 LV 다미에 패턴에 카모플라쥬 색을 입힌 ‘다모플라쥬’ 패턴[* 마치 픽셀화된 디지털 카모플라쥬 패턴이 연상된다.]을 쇼 초반부에 대치하며 새로운 퍼렐 본인의 시그니쳐를 선보였다. 과거 샤넬과의 컬래버, [[NIGO]]와의 오랜 관계를 통해 정체성을 확립한 퍼렐만의 색을 진하게 입혔는데 본인이 샤넬에도 오랫동안 몸 담았던 터라 중후반부에 대거 등장시킨 진주 장식과 트위드, 크롭 기장에 꽉 끼는 자켓 특유의 핏 등 샤넬의 색이 너무 들어간 부분도 있었으며 안전한 선택을 했다는 비판이 있다.[* 실제로 본인이 [[칼 라거펠드]] 디자인에 큰 영향을 받았다고 인터뷰하기도 했다.] 결론적으로 데뷔 컬렉션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괜찮은 성과였다는 평가가 주를 이루며 앞서 언급된 우려들은 어느 정도 잠재웠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